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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장

[책 리뷰] 야간비행(생택쥐페리/더클래식)

by 읽쿠 2023. 7. 14.

◎ 읽쿠 추천: 짧은 이야기 속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스토리, 그리고 헤어 나올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장이 매력적인 책

 
사람들은 대부분 생택쥐페리에 대하여 '어린왕자'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작가이면서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우연히 JTBC의 여행프로그램 '트래블러-아르헨티나'를 통해 생택쥐페리가 파타고니아로 우편물을 나르는 비행 조종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문득, 그의 또 다른 책으로 알려진 '야간비행'의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처음 야간비행 책을 사고 표지를 봤을 때 가수 백예린의 노래 '야간비행'이 생각났다. 가사 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꿈에서 봤던 빚 그 꽃을 찾아서
난 지금 어딘가로 야간비행 
내일이 없다고 해도 달려가
더클래식/야간비행

 
이 노래때문인지 언뜻 책 제목만 봤을 땐 매우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어보니 낭만보다는 불안이, 신비로움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펼쳐졌다. 책의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스토리여서일까, 아니면 생택쥐페리가 비행 중 실종·사망했다는 사실 때문일까.  생택쥐페리의 삶이 가장 잘 드러나 보였던 책 '야간비행'은 완독 후에도 내게 아주 진한 여운을 남긴 책 중 하나가 되었다. 
 

1. 간략한 내용

비행기가 우편물을  배달하기 시작한 시기,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의 항공 우편회사  책임자 '리비에르'는 당시 운송 수단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막 개척된 '야간비행'을 강행한다. 당시 야간비행은 매우 위험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낮과 달리 밤은 안개나 비구름 등 예측불가능한 요소가 많아서 사고 발생 시 대부분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리비에르는 팀원이었던 파비엥에게 파타고니아에서 출발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비행기를 조종해 오는 야간비행을 맡긴다. 비행기는 도착할 시간이 한참 지나도 보이지 않고, 연락이 두절되고 마는데, 총 책임자였던 리비에르는 그 상황에서도 냉정한 모습을 잃지 않으며 또다시 우편 비행기를 출발시킨다. 
 

2. 필사 모먼트

파비앵은 이제 그만 무기를 내려놓고 무거운 몸과 근육을 살피고 싶었다. 인간은 가난 속에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니, 이제부터는 그저 소박하게 창문 밖으로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그는 이런 조그만 마을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인간은 일단 선택하고 나면 삶이 빚어내는 우연에 만족하며 그곳을 사랑하는 법이니까. 그것은 사랑처럼 우리를 가두어 놓는다. 파비앵은 이 마을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이곳의 영원성의 한 부분이 되고 싶었다. 

생택쥐페리는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파타고니아'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그의 애정이 소설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마도 조그만 마을에서 오래도록 살며 영원성의 한 부분이 되고 싶다는 파비앵의 소망은 생택쥐페리의 소망이기도 할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저 소박한 별 하나는 외딴 집 한 채다. 불빛이 꺼지면 집은 자신의 사랑 속에 갇힌다. 또는 근심 속에 갇힌다. 그 집은 이제 세상과의 교신을 그치게 된다. 식탁의 등불 앞에 앉은 저 농부들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욕망이 이 거대한 밤 속에 이렇게 멀리까지 와닿는 줄 모른다.
저 농부들은 자신들의 등불이 초라한 식탁을 비출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80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마치 누군가가 무인도에서 바다를 향해 절망적으로 흔들어 대는 등불처럼 보여 그 불빛의 부름에 감동받는 것이다. 

야간비행의 이야기와 결말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비극적인 이야기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비극의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파비앵의 눈을 통해 파타고니아를 바라보는 생택쥐페리의 작고 따듯한 문장들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식탁 앞에 놓인 초라한 등불이 사실은 저 멀리 비행기의 길이 되어주는 등불처럼 보인다는 말이 매우 인상깊었다. 
빽빽한 도시 풍경 속에  밤이 늦도록 켜져 있는 불빛들. 그 불빛을 내고 있을 야근하는 직장인들도 분명 자신이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선사하는 중요한 불빛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 

그는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을 늙어서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밀쳐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날 것처럼, 삶의 끝에 이르면 상상해 오던 그 다행스러운 평화를 얻어 낼 것처럼. 하지만 평화란 없다. 아마 승리도 없을 것이다. 모든 우편기의 최종적인 도착이란 없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날 것처럼' 사람들은 당장의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시간이 날 때를 대비하여 행복을 잠시 창고에 저장해두려는 듯하다. 

'그들을 강렬한 삶으로 밀어붙여야 해. 그것은 고통과 기쁨을 불러오지만 그런 삶만이 중요하지.'
'나는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 그건 알 수 없다. 내가 까다롭게 굴면 사고가 줄어든다. 책임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것은 모두를 건드리지 못하면 결코 누구에게도 미치지 못할 모호한 힘 같은 것이다. 만일 내가 아주 정당하다면 야간비행은 매번 죽음의 기회가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 들은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위험에 처한 배 안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감정은 사람을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를 받기로 했다.

파비앵의 비행기가 실종된 후, 본격적으로 리비에르의 성향과 책임감이 두드러져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 속에서 조차 리비에르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임무완수와 우편 항공 업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은 실제로 생택쥐페리의 직장 상사였던 조종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이 다리가 처참하게 뭉개진 부상자의 얼굴만 한 가치가 있을까요?"
그 다리를 이용할 그 어떤 농부도 인근의 다른 다리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한 사람의 얼굴을 짓이겨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들은 세워진다. 기술자는 덧붙여 말했다.
"전체의 이익은 개개인의 이익이 모여 이루어지죠.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아요."
한참 후에 리비에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요... 그런데 그게 무엇일까요?"

대의. 즉 '사회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라는 질문은 야간비행 스토리의 핵심이 되는 논제거리다.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는 모든 국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정작 그 다리를 시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일한다. 그렇다면 다리를 공사한 몇몇 시공자들의 희생은 다리를 이용할 많은 국민들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를 수 도 있다는 위험을 알면서도 항공 우편사의 책임자로서 지속적으로 야간비행을 지시하는 리비에르는 이러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 왔을 것이다.  
 

고민이 많을 무렵 힘이 되어준 리비에르의 말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는 해결책이 없어. 다만 추진력이 있는 거야.
그런 힘을 창출해야 하고. 그러면 해결책은 뒤따라오는 법이네."
그는 아직 싸울 수 있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적인 숙명이란 없으니까.
하지만 내적인 숙명은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 그것은 찾아온다. 그러면 온갖 실수가 현기증처럼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다.
승리... 패배...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생명이란 이런 말들의 이미지보다 더 깊은 곳에 있으며, 이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한 번의 승리는 한 민족을 약화시키고, 한 번의 실패는 다른 민족을 각성시킨다. 리비에르가 감내한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약속일 것이다. 오직 전진하는 사건만이 중요하다.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워질 수 록'리비에르의 MBTI는 혹시 ESTJ가 아닐까?'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집중하는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비록 마음 속으로는 온갖 불안과 고뇌가 싸우고 있을지라도 절대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그가 안타깝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3. 완독 소감

소설 속 파비앵 처럼, 생택쥐페리 역시 비행 중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인물인 '파비앵'이 그의 모습과 오버레이 되며 안타까운 마음과 스토리의 여운을 증폭시켰다.
'야간비행'은 내용도 인상깊지만 생택쥐페리가 기록한 문장들이 아름다워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다. (이미 벌써 2번 읽음)
소설 자체는 매우 짧고, '야간비행-조종사 실종-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이라는 아주 단순한 구성을 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러한 스토리를 빌려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이 사랑했던 작은 마을 파타고니아를 보여주고 싶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작은 불빛도 어쩌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격려를 주고 싶고,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논제를 던져주기도 했다.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 속에 여러 메시지가 보이는 책이었다.
우리는 리비에르처럼 언제나 자신의 행동에 고뇌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이렇게 계속 전진하는 것이 맞는 것일지 의문도 들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뇌와 함께 무언가 결과가 뒤따르는 행동을 지속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가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 역시 지금껏 몰랐던 의미를 찾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가의 불면증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그건 훌륭한 불면증일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