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쿠 추천: 책을 펼치는 순간 시모키타자와로 이동하고, 글을 읽는 내내 주인공과 함께 상처 치유 여행을 하게 되는 따뜻한 책
일본 소설은 사람의 깊은 내면 속에 숨겨진 감정들을 글로 잘 풀어낸다. 현실에서는 누군가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괴상한 감정들까지 아주 솔직하게 풀어내는 소설이 많은 편이다. 아마도 이 점이 내가 일본 소설을 자주 읽는 이유인 것 같다. (가끔은 심오하다 싶을 만큼 지하 동굴 속 감정까지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연속으로 두 번을 완독 한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 '요시에'의 상황과 감정에 집중이 되었는데 두 번째로 읽으니 요시에와 엄마의 관계가 눈에 많이 들어왔다. 그만큼 내가 한번쯤은, 아니 지금도 느끼고 있었던 다양한 고민과 감정, 상황들을 요시에가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게다가 두 번의 완독을 하고 나니, 시모키타자와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이미 여행을 다녀간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은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여건이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시모키타자와로 꼭 방문해 보고 싶다.
1. 간략한 줄거리
어느 날 요시에는 아빠가 차 안에서 모르는 여성과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여성과 어떤 관계였는지, 왜 자살을 했는지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던 요시에는 아빠의 장례 후 집에서 나와 '시모키타자와'라는 동네에서 자취를 시작하고, 엄마 역시 아빠의 귀신이 보이는 것 같다며 요시에의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요시에는 자취방 바로 앞의 레스토랑에서, 엄마는 동네 카페에서 일하며 아빠의 죽음 후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하고, 문득문득 아빠가 죽던 날의 기억과 후회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시모키타자와라는 동네 안에서 아빠와 연관되었던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하며 조금씩 상처를 치유해 가는 이야기다.
2. 필사 모먼트
일상이란 그런 때에도 유지되어야 하고, 또 어떻게든 유지된다. 나는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차이 없는 거서럼 태연해 보이는 자신이 신기했다. 속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쇼윈도에 비친 내 겉모습은 예전과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 저 사람들처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카페에 가만히 앉아 사람구경하는 나를 보면서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났다. 다들 각자만의 고민과 걱정이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반듯하게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질 것 같아. 제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서 열심히 기를 쓰고 살아왔는데, 생각할 수 있는 가혹한 일 중에서도 정도가 아주 심한 일이 벌어졌잖니."
" '어른이 되어 반듯하게 제대로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가르침으로 나를 세뇌한 이 세상 모든 것에, 지금은 그저 반항하고 싶은 기분이야."
이미 다 커버린 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요시에의 엄마는 자기만의 세상 속에 무언가가 무너진 느낌이었나 보다. 이 문장들로 그녀의 혼란이 얼마나 큰 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 있었을텐데.
사소한 실수라도 내 안에 남은 앙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틀림없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배워 가고 있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의 본능에 관련된 것이라서 더욱 많은 것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자기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것이 반드시 다른 형태로 튀어나오고 만다. 성실하게, 무던하게, 개성이나 사념을 떨치고 정성을 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수년간 사회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많은 상황을 맞닥뜨리며 배운 것이다. 순간순간에 찌꺼기처럼 남겨버린 안 좋은 감정들은 반드시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 어린아이처럼 '아몰라'하고 도망칠 수 있는 나이는 지난것 같다. 무엇을 하든 조심하게되고, 나만의 감정이든, 누군가와 함께 나눈 관계든 안좋은 찌꺼기나 실수를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나 역시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에의 말처럼 그저 나는 성실하게, 무던하게, 개성이나 사념을 떨치고 정성을 들여 살아갈 수밖에. 가장 어렵지만 이것뿐이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늘려 가는 힘과 줄여 가는 힘이 같은 분량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분량은 같은데, 줄여 가는 힘 쪽이 크게 느껴진다는 것도. 그래도 나는 여자라서, 줄여 가는 힘을 무시할 수 있다. 마치 없는 것처럼, 감자를 씻듯이, 마당에 돋은 잡초를 뽑아내듯이, 몸을 사용해서 다른 힘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다.
"점점, 점점 세상의 때 같은 것이, 안개 같은 것이 무거워져서였을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잃어 가다 보니까.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상태였던 걸까."
시간이 흘러간다. 지금은 지금이다. 악몽에 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생리적으로 그냥 지고 만다. 진 채로, 무심히 보는 풍경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만큼은 아직 어른이 아니다.
요시에와 엄마가 아빠이자 남편인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트라우마를 치유해 가는 과정은 급하지 않다. 상처 치유의 과정에서 두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반성하고,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을 한다. 이런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요시에 모녀를 응원하면서도 공감했다.
"우리가 본 게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말았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어. 든든하고 상태가 좋은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돼. 가장 낮은 선에서 보고, 오늘은 그나마 아주 좋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좋아. 그러면 꿈도 무섭지 않을 거야." 낮은 곳에서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슬프디 슬픈 안심. 홀로 남은 것이 아니라서 안도하는 비참한 행복. 지금은 그런 것이 무엇보다 따스하다.
아직 젊은데 이런 꼴을 당했다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건 이제 그만두자. 이미 이렇게 된 거니까. 세상에는 더 가혹한 일을 당한 사람도 많으니까. 흐름을 거스른 일이 갑자기 생겨 이상해졌을 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든든하고 상태가 좋은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돼. 가장 낮은 선에서 보고, 오늘은 그나마 아주 좋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좋아"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닌, 오직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나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과 비교하고, 나의 주변 환경만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 연민과 비하에 빠지게 된다. 나를 중심에 세우고, 지금의 나를 살아가는 것이 쉽진 않지만.
3. 완독 소감
<안녕 시모키타자와>를 읽으며 눈물을 자주 쏟아냈다고 하면 내가 조금 이상해 보일까? 내용이 슬퍼서 울었다기 보단, 뭔가 깊은 내면에 있던 우울감과 자기 비하을 끄집어내어 치유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요시에의 상황이 나와 같진 않지만, 그녀가 아빠의 죽음 후 불어나는 속마음을 고백하듯 써 내려간 글들이 자주 방황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는 나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두 번째로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요시에 엄마가 우리 엄마와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과 딸을 모두 독립시키고, 솟아오르는 우울감을 이겨내며 아르바이트 어플을 들여다보는 우리 엄마. 가끔 통화를 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 요시에 엄마가 하는 말들을 보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 시모키타자와>의 스토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마! 앞을 보고 달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충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되짚어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마음을 다잡을 시간을 충분히 준다.(이것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마법일까 싶을 정도!) 그런 면에서 언젠가 또 막힘이 생기거나, 나의 마음을 조용히 공감하고 치유해 줄 친구가 필요할 때 다시 찾게 될 듯하다.(사실 끝 마무리가 조금 마음에 들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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